초밥과 삼겹살의 나라, 폴란드 (머글 버전)

초밥과 삼겹살의 나라, 폴란드 (머글 버전)

폴란드는 몇 년 전부터 여행지 버켓리스트에 있었다. 10년 전부터 알고 지낸 한 살 어린 요리사 친구가 바르샤바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요리사라는 직업이 연예인 못지 않은 스타로까지 성장할 수 있는 전문직이 되었지만, 1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의 인식은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친구는 홀로 폴란드로 건너가 산전수전을 겪으며, 이제 직원들을 거느린 어엿한 퓨전 아시안 레스트로랑의 오너가 되었다.

비행기 도착 시간이 늦어서 둘쨋날이 되어서야 친구가 운영하는 식당을 방문할 수 있었다. ‘여기서 주무시면 안되요.’ 여독이 덜 풀려 가게 앞 벤치에서 멍때리며 기다리던 나에게, 3년만에 만난 친구는 3일만에 만난듯 농담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바르샤바 한국문화원 근처에 위치한 식당에서 주변 현지 상인들과 허물없이 장난을 주고받으며 열심히 일하는 친구의 모습은 확실히 폴란드에 잘 자리잡고 살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항상 술이나 마시고 친구들과 장난만 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자리잡고 지내는 걸 보니 대견하면서도 진심으로 기쁘고 안도가 되었다. 장가만 가면 이제 더 걱정할게 없을 것 같았다. ‘폴란드에 오셨으니 초밥 드셔야죠?’ ‘바르샤바는 역시 삼겹살이죠’ 그렇게 우리는 바르샤바에 머무르는 매일 친구의 식당에 들러서 초밥과 삼겹살과 비빔국수를 먹었다. 여담으로, 친구가 폴란드 정육점에 가서 팔지 않는 부위인 삼겹살을 얻어갈 수 없냐고 묻자, 엄청 큰 개를 기르냐며 고기를 선뜻 떼주더란다.

사실 이 친구가 살고 있다는 부분을 빼면, 폴란드나 바르샤바는 꼭 가보고 싶은 곳까지는 아니었다. 별로 매력을 못 느꼈다기보다는, 아는 것이 없으니 무엇에서 매력을 느껴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리고 기존 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한 편견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왠지 도시 전체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을거란 상상은, 공산당을 늑대와 돼지 괴물로 배우고 자란 어린 시절의 여파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직접 가 본 바르샤바는 유럽 어떤 도시보다도 편안하고, 친절하고, 우호적이었다. 동양인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낯선 시선 따위는 느낄 수 없었고,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봐도 자신이 기다리던 횡단보도 신호를 미뤄가며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책에서 본 바로는 삼성 등 국내 기업들이 진출해 있어서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좋은 편이라고도 한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폴란드의 다른 도시인 크라쿠프(Krakow)와 같은 화려한 아름다움은 없지만, 너무 시끄럽지도 고요하지도 않은 바르샤바 올드타운의 적당하게 즐거운 소음은 몇 일, 몇 주라도 이 곳에 머물고 싶게 만들었다.

잠시나마 겪어본 폴란드인들의 성격은 온화하고 다정한 편이었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고, 낯선 사람에게 친절하지만 사무적인 서양인들을 많이 봐서 더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친구 말로는 한마디로 ‘순둥이’란다. 국민의 95%가 카톨릭 신자일 정도로 카톨릭 문화 기반이 강해서 다른 민족에 비해 보수적이지만, 슬라브 문화의 영향으로 술과 춤을 좋아하는 자유분방한 성향도 동시에 갖는다. 가족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규정된 퇴근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상적이라고 한다. 한국식 직장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 고용주라면 직원들의 이런 행동이 못마땅할 법도 한데, 친구는 당연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크라쿠프는 바르샤바에서 기차로 2시간 반 정도 남쪽에 위치한 도시로, 규모는 작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지난 시대의 흔적이 잘 보존된 곳이다. 그래서 중앙 시장 광장(Rynek Growny)에는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관광객들이 넘쳐나고, 이 도시, 혹은 폴란드라는 국가도 이러한 관광 자원으로부터 일정 부분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것 같다. 유럽 국가 중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자원이 많은 국가들, 특히 그 중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은 그리스 같은 국가를 보면, ‘선대의 문명으로 먹고 산다’는 말이 나올 만큼 부러운 반면, 그만큼 그 문물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왔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우리의 문화 유산을 얼마나 잘 보존해 왔는가 생각하게 된다. 어벤져스의 한국 촬영에 대한 천문학적인 경제적 효과를 예상하더니, 막상 개봉하고 나니 어디서 찍었는지조차 모르겠던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닌가 싶다.

크라쿠프는 성마리아성당(St. Mary’s Basilica)을 비롯한 광장 주변의 건물들과 바벨성(Wawel Royal Castle)을 하루 정도면 둘러볼 수 있을 정도의 규모이다. 물론 역사 등에 관심이 많아서 박물관의 전시관을 하나 하나 자세히 보는 경우는 별개로 말이다. 우리처럼 일정이 조금 더 길다면 아우슈비츠(Auschwitz)나 소금광산(Wieliczka Salt Mine)을 볼 수 있는데, 처음에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아우슈비츠를 가기 위해 예약까지 했다가, 보고 나면 좀 우울해진다는 의견이 있어서 소금광산으로 변경했다. 버스로 넉넉히 1시간이면 이동할 수 있는 곳인데 미리 예약할 필요는 없고, 버스 시간이나 입장 시간 정도만 신경 쓰면 된다. 광산이 상당히 깊고 크고 내부 통로가 복잡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다닐 수는 없고, 반드시 가이드를 동반한 그룹으로 다녀야 한다. 한국어 가이드는 아직 없기 때문에 여행사 등을 통해 가능한지 알아보거나, 영어 등 다른 언어로 참여하면 된다. 처음에는 소금광산이라고 해서 큰 기대를 안했는데, 내부에 예배당이 있을 정도로 여러가지 다양한 시설이 있어서 볼거리가 풍부하다. 크라쿠프에 방문해서 일정이 여유가 된다면 추천 코스다.

처음 행선지를 정한 곳은 폴란드의 바르샤바였지만, 가장 기대가 되었던 곳은 체코의 프라하(Prague)였다. 우리나라에도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등’ 미디어를 통해 많이 알려졌고, 다녀온 사람마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곳이니 말이다. 크라쿠프에서 프라하까지는 2층 침대가 있는 야간열차를 이용했는데, 숙박비와 시간을 동시에 절약할 수 있어서 일정이 짧은 경우 유용한 이동 수단이다. 다만 아무래도 운행 시 어느정도 진동과 소음이 있기 때문에 잠자리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은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베게만 대면 잠이 드는 체질인 나와, 여행이라면 피곤도 불사하는 아내는, 아침 7시 프라하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호텔에 맡기고 시내로 나왔다.

아내와 나는 공통점이 많은데 그 중 하나는 느긋하게 보내는 여행 스타일이다. 일정이 좀 모자르다 싶으면 유명한 곳이라고 하더라도 과감히 포기한다. 그래서 파리에 3일인가를 있으면서도 루브르(Louvre) 박물관을 안갔다. 한가지 차이점이라면, 아내는 여행 중이라도 숙면을 취하고 조식 끝날 때쯤 아침 식사를 하고 정오가 다되어서야 숙소를 나오는 취향인 반면, 나는 아무데도 가지 않고 길거리에 앉아 행인만 구경하더라도 일단 숙소에서는 빨리 나왔으면 하는 주의다. 프라하는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도시이지만, 우리같은 느긋한 여행자들에게 특히 더할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어느 길을 다녀도 골목의 건물 하나하나 사연이 있어 보이고, 조금만 트인 곳에 나오면 프라하성(Prague Castle)이나 카를교(Charles Bridge)가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우리는 마지막 여정인 프라하에서 아무 계획 없이 배고프면 먹고, 다리가 아프면 앉아서 쉬며 여행을 마무리했다.

보통 여행지를 정할 때 지금까지 가보지 않은 곳을 정하게 된다. 바꿔 말하면, 한 번 갔던 곳은 다시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 부부 둘 다 여행 스타일이 일정을 꽉 채우는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에 가면 여기는 꼭 가야 한다’는 곳 한두 군데만큼은 들르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는 바르샤바에선 올드타운 밖으로는 거의 나가질 않았고, 크라쿠프 근처의 아우슈비츠(Auschwitz)도 예약까지 해놓고 가지 않았다. 보통은 조바심이 날법도 한데 묘하게 마음이 가벼웠다. 왠지 이번에 다녀온 폴란드만큼은 다시 돌아올 것 같아서였다. 초밥과 삼겹살의 나라,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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