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밥과 삼겹살의 나라, 폴란드

* 회사 사보 원고로 썼는데 춤 얘기가 너무 많다는 전직 인사과장님의 의견에 따라 파기한 글입니다. ㅡㅜ 다른 나라는 한달쯤 쉬어야 재충전해서 일도 잘한다고 한다는데......


초밥과 삼겹살의 나라, 폴란드

여행은 언제나 특별하다.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 처음 먹어보는 음식, 아름다운 자연, 낯선 거리, 모든 것이 특별하다. 그런데 아내와 나의 여행에는 조금 더 특별한 것이 있다. 춤과, 옛 친구, 그리고 새로운 친구이다. 여행의 즐거움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많은 여행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나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서 그들만의 인생을 살아온 타인과의 만남은, 단순히 그들이 살아온 환경을 접하는 것 이상의 놀라움이 있다. 하지만 그런 즐거운 만남이 쉽지 않은 것은 언어와 공감대, 그리고 계기 때문인데, 춤이라는 매개체는 이 세 가지 장벽 모두를 어느정도 낮춰준다. 언어로만 소통하기 어려운 부분을 함께 춤을 추며 채워가고, 춤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갖고, 서로 춤을 추기 위한 확실한 목적을 갖고 만난다.


폴란드는 몇 년 전부터 여행지 버켓리스트에 있었다. 10년 전부터 알고 지낸 요리사 친구가 바르샤바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요리사라는 직업이 연예인 못지 않은 스타로까지 성장할 수 있는 전문직이 되었지만, 1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의 인식은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친구는 홀로 폴란드로 건너가 산전수전을 겪으며, 이제 직원들을 거느린 어엿한 퓨전 아시안 레스트로랑의 오너가 되었다. 그러던 중 바르샤바 린디합 익스체인지(Warsaw Lindy Hop Exchange)라는 행사가 매년 6월에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운좋게 강사 자격으로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댄스 행사는 그 목적에 따라 챔피언십(championship), 캠프(camp) 등으로 그 명칭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익스체인지(exchange)는 주로 타국가/지역 간 댄서들의 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행사를 말한다.



댄스 행사에 참여하는 형식으로 여행을 가게 되면 일반적인 여행과 여정이 조금 달라지게 된다. 밤에는 춤을 추고, 낮에는 관광을 하고, 그리고 때로는 또 낮에도 춤을 추게 되는데, 좋게 보면 알찬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고, 반면 그만큼 힘들기 때문에 강한 체력을 필요하게 된다. 평소대로라면 새벽까지 춤을 추고 숙소로 돌아와, 조식 마감 전까지 잠을 자다가 간신히 아침을 먹고, 오후부터 관광을 시작해 그 날 파티 전까지 시내를 돌아다녔겠지만, 이번엔 강습 때문에 올드타운(old town) 외에는 거의 구경하질 못했다. 첫날도 도착하자마자 호텔에 들러서 샤워만 하고, 시차적응 안된 몽롱한 기분으로 웰컴파티 장소로 직행했다.




덕분에 둘쨋날이 되어서야 친구가 운영하는 식당을 방문할 수 있었다. ‘여기서 주무시면 안되요.’ 여독이 덜 풀려 가게 앞 벤치에서 멍때리며 기다리던 나에게, 3년만에 만난 친구는 3일만에 만난듯 농담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바르샤바 한국문화원 근처에 위치한 식당에서 주변 현지 상인들과 허물없이 장난을 주고받으며 열심히 일하는 친구의 모습은 확실히 폴란드에 잘 자리잡고 살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항상 술이나 마시고 친구들과 장난만 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자리잡고 지내는 걸 보니 대견하면서도 진심으로 기쁘고 안도가 되었다. 장가만 가면 이제 더 걱정할게 없을 것 같았다. ‘폴란드에 오셨으니 초밥 드셔야죠?’ ‘바르샤바는 역시 삼겹살이죠’ 그렇게 우리는 바르샤바에 머무르는 매일 친구의 식당에 들러서 초밥과 삼겹살과 비빔국수를 먹었다. 여담으로, 친구가 폴란드 정육점에 가서 팔지 않는 부위인 삼겹살을 얻어갈 수 없냐고 묻자, 엄청 큰 개를 기르냐며 고기를 선뜻 떼주더란다.



사실 이 친구가 살고 있다는 부분을 빼면, 폴란드나 바르샤바는 꼭 가보고 싶은 곳까지는 아니었다. 별로 매력을 못 느꼈다기보다는, 아는 것이 없으니 무엇에서 매력을 느껴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리고 기존 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한 편견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왠지 도시 전체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을거란 상상은, 공산당을 늑대와 돼지 괴물로 배우고 자란 어린 시절의 여파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직접 가 본 바르샤바는 유럽 어떤 도시보다도 편안하고, 친절하고, 우호적이었다. 동양인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낯선 시선 따위는 느낄 수 없었고,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봐도 자신이 기다리던 횡단보도 신호를 미뤄가며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책에서 본 바로는 삼성 등 국내 기업들이 진출해 있어서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좋은 편이라고도 한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폴란드의 다른 도시인 크라쿠프(Krakow)와 같은 화려한 아름다움은 없지만, 너무 시끄럽지도 고요하지도 않은 바르샤바 올드타운의 적당하게 즐거운 소음은 몇 일, 몇 주라도 이 곳에 머물고 싶게 만들었다.



강사는 이스라엘, 리투아니아, 그리고 우리까지 총 세 쌍이 참여했다. 우리보다 춤을 일찍 배우는 외국 특성상 다들 어린 편이었는데, 리투아니아에서 온 여자 강사는 심지어 19살이었다. 다들 착하고 성격이 좋아서 행사 기간 내내 즐겁게 지낼 수 있었고, 짧은 시간 정든 만큼 마지막날 헤어질 때도 오랫동안 여러번 인사를 나누었다. 외국에서 하는 강습은 처음이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많이 되는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자유분방하면서도 적극적인 강습생들의 태도가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강습 중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지면 서로가 조용히 시키면서 강습에 집중을 하기도 하고, 강습이 끝나고 나면 먼저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어떤 부분이 좋았으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많이들 했다. 부족한 부분을 묻는 질문에도 성의껏 답변을 해주어서 다음 강습에 많이 참고할 수 있었다. 인사치레 칭찬, 회피가 목적인 비판 아닌 비판이 아니라, 진심어린 목소리로 감정을 전달할 때의 긍정적인 영향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다.



바르샤바를 떠나서 크라쿠프에서 소금광산 등을 구경하고 이틀 정도를 머문 후, 밤기차를 타고 체코 프라하(Prague)로 넘어갔다. 그리고 일정에 구애 받지 않고 아름다운 프라하의 성과 카를교(Charles Bridge), 그리고 거리들을  3일 동안 발길 닿는대로 돌아다녔다. 크라쿠프 광장(Rynek Growny)의 야경, 해질녘 카를교에 켜지는 아름다운 가로등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들에 대한 흥미가 오래가지 못한 것은,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우리 부부의 취향 때문이기도 하고, 바르샤바에서 받아던 따뜻한 인상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인 듯 했다.


보통 여행지를 정할 때 지금까지 가보지 않은 곳을 정하게 된다. 바꿔 말하면, 한 번 갔던 곳은 다시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 부부 둘 다 여행 스타일이 일정을 꽉 채우는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에 가면 여기는 꼭 가야 한다’는 곳 한두 군데만큼은 들르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는 바르샤바에선 올드타운 밖으로는 거의 나가질 않았고, 크라쿠프 근처의 아우슈비츠(Auschwitz)도 예약까지 해놓고 가지 않았다. 보통은 조바심이 날법도 한데 묘하게 마음이 가벼웠다. 왠지 폴란드만큼은 다시 돌아올 것 같아서였다. 초밥과 삼겹살의 나라,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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